유물
동경통지
최남선이 편집하고 1933년 문파 최준이 발행하였다. 동경잡기의 오류를 바로잡고 소략한 부분에 새로운 내용을 보충하였다.
연계안
경주 출신 인물 가운데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 또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과 관련된 정보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현재 경주최부자댁에서는 여러 가지 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추수기·수세기
농가의 한 해 수확을 파악하고, 작인들의 지대 수취액을 관리하기 위해 작성한 장부이다. 경주최부자댁 추수기는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 초기 지주가의 농업 경영을 파악할 수 있는 장기간의 시계열자료라는 점에서 문헌사적 가치가 크다.
기구성책·진급기
경주 지역민 가운데 구휼 대상을 조사하여 기록한 기구성책이다. 곡식을 나눠줄 사람의 명단과 배급한 곡식의 내역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1907년 6월 작성한 경상북도 경주군의 국채보상 의연금 목록이다. 군민 50,73명이 참여하여 총 3,250원을 모금했는데 이를 동과 리, 직장별로 나누고 직위와 이름, 개별 성금액과 총액 등을 표기했다. 1권 첫 장에 교촌이 나오고 첫머리에 최현식·최현교 형제의 이름과 성금액이 적혀있다.
백산 안희제 간찰
독립운동 자금지원으로 창립 임원진과 일반 주주 사이의 갈등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 감사 김상원과 이사 조동옥이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해 중역불신임안을 상정하려 하자, 안희제가 최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서한이다. 경주최부자댁에서는 이외에도 2만여 건의 간찰을 소장하고 있다.
대구대학
재단법인 대구대학의 정관과 부칙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이다. 대구대학은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최준의 기부로 설립되었다. 이후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 합병과정을 거쳐 현재의 영남대학으로 이어졌다.
정무공 최진립 관련 유적
충의당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28-17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9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살던 집으로, 이전에는 당호가 ‘흠흠당(欽欽堂)’이었으나, 1760년경 중수한 뒤 ‘충의당(忠義堂)’이라 하였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9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살던 집으로, 이전에는 당호가 ‘흠흠당(欽欽堂)’이었으나, 1760년경 중수한 뒤 ‘충의당(忠義堂)’이라 하였다.
용산서원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
최진립 장군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 경주 부윤 이형상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하였다. 이듬해 묘가 이루어져 위판을 봉안하였고, 1711년 ‘숭렬사우(崇烈祠宇)’로 사액되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
최진립 장군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 경주 부윤 이형상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하였다. 이듬해 묘가 이루어져 위판을 봉안하였고, 1711년 ‘숭렬사우(崇烈祠宇)’로 사액되었다.
충노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235
최진립 장군의 충노(忠奴)인 기별과 옥동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두 노비는 평생 정무공을 모셨으며, 병자호란 때 정무공과 함께 순국하였다. 정무공의 제사를 지내는 날은 두 노비의 제사도 함께 올린다.
최진립 장군의 충노(忠奴)인 기별과 옥동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두 노비는 평생 정무공을 모셨으며, 병자호란 때 정무공과 함께 순국하였다. 정무공의 제사를 지내는 날은 두 노비의 제사도 함께 올린다.
신도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19
최진립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으로 용산서원 입구에 있다. 치술령산의 돌로 제작했으며 섬세하고 웅장하다.
최진립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으로 용산서원 입구에 있다. 치술령산의 돌로 제작했으며 섬세하고 웅장하다.
교촌 유적
작은댁
현재 교동법주 건물로, 7대 남강 최언경이 이조리에 살던 집을 허물어 교촌 향교 서편으로 옮겨 지은 집이다. 최부자 고택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교동법주는 3대 최국선 때부터 집안에서 빚기 시작한 술로, 1986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최경이 2대째 기능보유자로 명맥을 잇고 있다.
교동법주는 3대 최국선 때부터 집안에서 빚기 시작한 술로, 1986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최경이 2대째 기능보유자로 명맥을 잇고 있다.
뒷새댁
2대 부자 최준의 동생 최완의 집이다.
최완은 1909년 안희제 등과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임시의정원 의원·조사원을 역임하였다. 일경에 체포돼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최완은 1909년 안희제 등과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임시의정원 의원·조사원을 역임하였다. 일경에 체포돼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큰새댁
11대 부자 최현식의 동생 최현교의 집이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인 박상진은 이 집의 큰 사위이자, 12대 부자 최준의 사촌 매형이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인 박상진은 이 집의 큰 사위이자, 12대 부자 최준의 사촌 매형이다.
파회댁
최현교의 차남인 최영록이 분가하여 살던 집으로, 고택 스테이 ‘교동 석등 있는 집’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관이 서거한 후, 부인 최영백 여사(최준 선생의 사촌 누나)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 집에 있는 석등은 흥륜사지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석등 밑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숙연당(肅然堂)’은 집안 학동들의 서당으로 사용된 건물로, 원래 이름은 ‘필재정(必在亭)’이다. 월성 부근에 있던 건물을 옮겨왔으며, 숙연당 편액은 계파 최윤의 글씨이다.
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관이 서거한 후, 부인 최영백 여사(최준 선생의 사촌 누나)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 집에 있는 석등은 흥륜사지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석등 밑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숙연당(肅然堂)’은 집안 학동들의 서당으로 사용된 건물로, 원래 이름은 ‘필재정(必在亭)’이다. 월성 부근에 있던 건물을 옮겨왔으며, 숙연당 편액은 계파 최윤의 글씨이다.
밭가운데댁
12대 부자 최준의 첫째 동생인 계파 최윤이 분가해 지은 집이다.
최윤은 국악과 서예, 바둑에 능했으며 박동진 명창도 율객으로 이곳 사랑채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지금은 ‘요석궁’이라는 한정식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윤은 국악과 서예, 바둑에 능했으며 박동진 명창도 율객으로 이곳 사랑채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지금은 ‘요석궁’이라는 한정식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